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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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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슈미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작곡가, 첼리스트, 피아니스트, 음악 교사이다. 빈 음악원에서 작곡과 첼로를 공부했으며,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하는 빈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했다. 1914년 빈 음악원 피아노 교수로 임명되었고, 1925년 빈 음악 아카데미 이사, 1927년 원장을 역임하며 많은 음악가를 양성했다. 슈미트는 4개의 교향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일곱 개의 봉인의 책》 등을 작곡했으며, 그의 작품은 빈 고전-낭만주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독창적인 화성과 관현악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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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미트
기본 정보
빈 음악 아카데미 원장 시절
원어 이름Franz Schmidt
출생1874년 12월 22일
출생지프레스부르크
사망1939년 2월 11일
국적오스트리아
직업작곡가, 첼로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활동 시기해당사항 없음
음악 경력
장르클래식 음악
악기첼로, 피아노
영향해당사항 없음

2. 생애

프란츠 슈미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출신으로, 에서 주로 활동한 작곡가, 피아니스트, 첼리스트이다.[1][13]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음악 기초를 배웠고, 빈으로 이주하여 빈 음악원에서 로베르트 푸흐스, 페르디난트 헬메스베르거, 안톤 브루크너 등에게 사사하며 1896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5][6]

졸업 후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하던 빈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1914년까지 첼리스트로 활동했으며, 동시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로도 명성을 얻었다. 1914년부터는 모교인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 첼로, 작곡, 음악 이론 등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1925년에는 이사, 1927년부터 1931년까지는 원장을 역임했다.[7][13][8] 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으나, 지휘자로서의 평가는 엇갈렸다.[14]

슈미트의 개인적인 삶은 순탄치 않았다. 첫 번째 부인은 정신 질환으로 병원에 수용되었고 나중에 T4 작전으로 희생되었으며, 외동딸은 출산 후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9] 이러한 시련은 그의 작품, 특히 ''교향곡 4번''과 오라토리오 ''일곱 개의 봉인된 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결혼 후 잠시 안정을 찾았으나,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9]

1937년 건강 악화로 아카데미에서 은퇴한 후, 오스트리아나치 독일에 합병되는 시기를 겪었다. 나치 당국은 그를 높이 평가하며 칸타타 작곡을 의뢰하기도 했으나, 그는 이를 미완성으로 남겼다. 이 시기의 행적으로 인해 사후 나치 협력 논란이 일기도 했다.[10] 그는 1939년 오스트리아 페르히톨츠도르프에서 사망했으며,[10]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포조니/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에서 헝가리인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아 라바스(Mária Ravasz)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1]

그의 첫 음악 스승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마리아 라바스로, J. S. 바흐의 건반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지도를 받았다. 또한 프레스부르크의 프란체스코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펠리치안 요제프 모치크(Felizian Josef Moczik)로부터 음악 이론의 기초를 배웠다.[5] 어린 시절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에게 잠시 피아노를 배웠지만, 스승과 잘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1888년 가족과 함께 으로 이사했으며,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이곳에서 로베르트 푸흐스에게 작곡을, 페르디난트 헬메스베르거에게 첼로를 배웠고, 당시 병환 중이던 안톤 브루크너에게 잠시 대위법 수업을 받기도 했다.[6] 그는 1896년에 '우수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2. 2. 빈 궁정 오페라와 음악원 시절

1888년 가족과 함께 으로 이사하여 빈 음악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작곡은 로베르트 푸흐스, 첼로는 페르디난트 헬메스베르거에게 배웠으며, 안톤 브루크너에게 대위법을 배우기도 했다.[6] 1896년 '우수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13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빈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 자리를 얻어 1914년까지 활동했다. 당시 오케스트라는 종종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연주했는데, 말러는 수석 첼리스트 프리드리히 북스바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슈미트에게 모든 첼로 솔로 연주를 맡기곤 했다. 슈미트는 실내악 연주자로서도 수요가 많았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슈미트는 1914년 제국 음악 아카데미(당시 빈 음악원의 새 명칭)의 피아노 교수로 임명되었다.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에 "다른 한 명은 프란츠 슈미트"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7] 그는 아카데미에서 피아노, 첼로, 대위법, 작곡, 음악 이론 등을 가르쳤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스승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이야기했다고 한다.[13] 그의 유명한 제자로는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뷔러, 알프레트 로제, 작곡가 발터 브리히트, 테오도르 베르거, 마르셀 루빈, 알프레트 울, 류도비트 라이터 등이 있다.

슈미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활동했으나, 단원이었던 오토 슈트라써는 그의 지휘에 대해 "애초에 작곡가라는 자가 반드시 자신의 창작의 최상의 해석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바로 증명한다"라며 비판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14]

1925년에는 빈 음악 아카데미 이사로 선임되었고, 1927년부터 1931년까지는 원장(학장)직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프란츠 요제프 훈장과 빈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8] 건강 악화로 인해 1937년 초 아카데미에서 사임했다.

2. 3. 개인적인 삶과 건강 문제

슈미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부분에 속하는 포조니/프레스부르크 (현재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 라바스(Mária Ravasz)였다.[1] 그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1]

그의 첫 스승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마리아 라바스로, J. S. 바흐의 건반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지도를 받았다.[5] 그는 프레스부르크의 프란체스코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펠리치안 요제프 모치크(Felizian Josef Moczik)로부터 이론 기초를 배웠고,[5]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에게 잠시 피아노를 배웠으나, 스승과 잘 맞지 않았다. 1888년 가족과 함께 으로 이사하여 빈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작곡은 로베르트 푸흐스, 첼로는 페르디난트 헬메스베르거에게 배웠으며, 당시 병환 중이던 안톤 브루크너에게서 대위법 수업을 받기도 했다.[6] 1896년 '우수상'을 받고 졸업했다.

슈미트의 사생활은 그의 성공적인 전문 경력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카롤리네 페르신(Karoline Perssin, 1880년경~1943년)은 1919년 빈의 암 슈타인호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슈미트가 사망한 지 3년 후 T4 작전에 의해 살해당했다.[9] 그의 딸 엠마 슈미트 홀츠슈(Emma Schmidt Holzschuh, 1902년~1932년)는 1929년에 결혼했으나, 1932년 첫 아이를 낳은 후 예상치 못하게 사망했다.[9]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슈미트는 깊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으며, 이는 1933년 작곡된 교향곡 4번("딸을 위한 진혼곡"으로 표기)과 오라토리오 ''일곱 개의 봉인된 책''에 예술적으로 반영되었다.[9] 1923년, 그는 성공한 젊은 피아노 학생이었던 마르가레테 지라세크(Margarethe Jirasek, 1891년~1964년)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고, 이는 여러 심각한 건강 문제로 고통받던 그의 사생활에 절실히 필요했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9]

슈미트는 말년에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7년 빈 음악 아카데미 원장으로 취임했으나,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1937년 초에 아카데미에서 사임해야 했다.[9]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938년, 오스트리아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다. 나치 당국은 슈미트를 소위 오스트마르크의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작곡가로 칭송하며 ''독일 부활''이라는 칸타타 작곡을 의뢰했다. 이 일로 인해 1945년 이후 일부에서는 그를 나치 동조자로 비판하기도 했다.[10] 그러나 슈미트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1938년 여름과 가을, 즉 사망 몇 달 전에는 팔 하나를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의뢰받은 다른 두 작품(피아노 왼손, 클라리넷, 현악 삼중주를 위한 A장조 5중주곡과 피아노 독주를 위한 D단조 토카타)에 집중했다. 슈미트는 1939년 2월 11일 오스트리아 페르히톨츠도르프에서 사망했다.[10]

빈 중앙묘지에 있는 프란츠 슈미트의 무덤

2. 4. 나치 시대와 죽음

슈미트는 건강 악화로 1937년 초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은퇴하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오스트리아독일 제국에 의해 안슐루스를 당했고, 슈미트는 나치 당국으로부터 소위 오스트마르크의 가장 위대한 생존 작곡가로 칭송받았다. 그는 나치로부터 Deutsche Auferstehung|독일 부활de이라는 칸타타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이는 1945년 이후 그가 나치 동조자로 낙인찍히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슈미트는 이 칸타타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대신 1938년 여름과 가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왼팔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다른 두 작품, 즉 피아노(왼손), 클라리넷, 현악 삼중주를 위한 A장조 5중주곡과 피아노 독주를 위한 D단조 토카타 작곡에 몰두했다.

또한, 슈미트의 오라토리오 ''일곱 개의 봉인된 책'' 초연은 안슐루스 직후 나치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게오르크 틴트너는 슈미트가 당시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슈미트 작품의 지휘자였던 오스발트 카바스타는 열성적인 나치 당원으로 알려졌으며, 1946년 탈나치화 과정에서 지휘 금지를 당하자 자살했다. 이러한 정황들은 슈미트의 사후 명성에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938년 나치를 피해 망명한 슈미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오스카 아들러와 음악학자 한스 켈러 등은 슈미트가 나치나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정치적으로 매우 순진했다고 변호했다. 그의 정치적 순진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음악 평론가 마이클 스타인버그는 슈미트가 자신의 제자였던 유대인 이스라엘 브란드만의 '히브리 테마에 의한 변주곡'을 나치의 외곽 단체 성격인 독일 국민당 관련 음악 그룹에 추천했던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슈미트 주변의 주요 음악가 친구들 중에는 유대인이 많았으며, 그들은 슈미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나치로부터 의뢰받은 칸타타 '독일 부활'을 미완성으로 남긴 것 역시 그가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1996년 학술지 ''음악 분기''(The Musical Quarterly영어)에 실린 글에서 피터 라키는 슈미트와 나치즘의 연관성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나, 레온 보스타인은 이에 반박하는 등 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슈미트는 1939년 2월 11일에 사망했다.[10]

3. 작품 세계

작곡가로서 슈미트는 오스트리아에서 꾸준히 명성을 얻었으며, 빈 고전-낭만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은 조성 음악에 기반하면서도 혁신적인 구성과 말러, 쇤베르크 등의 새로운 음악 어법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준다. 주로 교향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등 대규모 형식을 선호했으며, 실내악오르간 작품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오르간 작품에서는 'Orgelbewegung|오르겔베베궁de'(오르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슈미트는 대체로 보수적인 작곡가로 여겨지지만,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교한 리듬과 복잡한 화성은 이러한 평가를 넘어서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모더니즘을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의 작품을 썼으며, 위대한 오스트리아 및 독일 작곡가들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화성 및 오케스트레이션에서 매우 개성적인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사후에는 나치즘 협력 혐의로 인해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측면이 크며, 슈미트의 유대인 친구이자 동료였던 오스카 아들러(Oskar Adler)나 한스 켈러(Hans Keller) 등에 의해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3. 1. 주요 작품

작곡가로서 슈미트는 비교적 늦게 성장했지만, 그의 명성은 1890년대 후반부터 사망 시점인 1939년까지 오스트리아에서 꾸준히 높아졌다. 그의 음악은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로부터 이어받은 빈 고전-낭만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리스트와 브람스의 '집시' 스타일도 발전시켰다. 슈미트의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장대하며 조성 음악에 기반을 두지만, 종종 혁신적인 구성을 보여주며 말러쇤베르크가 시도한 새로운 음악 어법에도 열린 태도를 보였다. 실내악 작품 수는 많지 않으나, 빌헬름 알트만과 같은 비평가들은 그 중요성과 높은 완성도를 인정했다. 그의 오르간 작품은 규모, 복잡성, 연주 난이도 면에서 당대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지만, 그가 지지했던 '오르겔베베궁'(Orgelbewegung|오르겔베베궁de, 오르간 운동)의 영향을 받아 더 작고 명료한 고전적 스타일의 악기를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면모를 보인다. 슈미트는 주로 대규모 형식의 작품에 집중했다.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장르작품명작곡 연도비고
교향곡교향곡 1번 마장조1899
교향곡교향곡 2번 내림마장조1913
교향곡교향곡 3번 가장조1928
교향곡교향곡 4번 다장조1933
오페라노트르담 (Notre Damede)1904-1906데임 그웬니스 존스와 제임스 킹이 출연한 음반이 있다.
오페라프레디군디스 (Fredigundisde)1916-1921
관현악곡베토벤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1923
관현악곡헝가리 경기병 노래에 의한 변주곡1930
협주곡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1899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1934
실내악현악 사중주 2곡1925, 1929
실내악피아노 오중주1926
실내악클라리넷 오중주 2곡
실내악현악 삼중주 2곡
실내악왼손을 위한 피아노 사중주곡 2곡1932, 1938
오르간곡전주곡푸가 마장조1924
오르간곡토카타 다장조1927
오라토리오일곱 봉인의 책 (Das Buch mit sieben Siegelnde)1935-1937요한묵시록에 의한 오라토리오


4. 평가와 영향

작곡가로서 슈미트는 성장이 더뎠지만, 적어도 오스트리아에서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39년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명성이 높아졌다. 그의 음악에서 슈미트는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로부터 물려받은 빈 고전-낭만주의 전통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리스트와 브람스의 "집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의 작품은 형식면에서 기념비적이며 언어면에서 확고하게 조성적이지만, 종종 디자인 면에서 혁신적이며 말러쇤베르크가 시작한 음악 구문의 새로운 발전에 분명히 열려 있다.

슈미트는 실내악을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빌헬름 알트만과 같은 평론가들은 그가 쓴 작품이 중요하고 질이 높다고 평가했다. 슈미트의 오르간 작품은 길이, 복잡성, 난이도 면에서 그 시대의 다른 작품과 비슷할 수 있지만, 그가 옹호했던 Orgelbewegung|오르겔베베궁de(오르간 운동)의 더 작고 더 선명한 고전 스타일 악기를 위해 구상되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슈미트는 주로 4개의 교향곡 (1899, 1913, 1928, 1933)과 두 개의 오페라: ''노트르담''(1904-6)과 ''프레디군디스''(1916-21)를 포함한 대규모 형식으로 작업했다. 데임 그웬니스 존스와 제임스 킹이 출연한 ''노트르담''의 CD 음반은 수년 동안 출시되었다.

슈미트는 대체로 보수적인 작곡가로 여겨진다. 그러나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보이는 리듬 면에서의 교묘함과 화성의 복잡성이 이를 배반한다. 슈미트는 모더니스트가 되지 않고도 모던한 작품을 썼으며, 일련의 위대한 오스트리아 및 독일 작곡가에 대한 존경심과 화성 및 오케스트레이션에서의 매우 개성적인 독창성을 결합했다.

사후 평가는 잘못 전달된 나치즘 협력 혐의로 인해 오랫동안 좋지 않았지만, 슈미트의 유대인 친구, 동료들 ― 오스카 아들러(Oskar Adler)나 한스 켈러(Hans Keller) 등 ― 에 의해 강력한 반증이 제기되어 왔다.

5. 작품 목록


  • 교향곡 1번 마장조 (1899)
  • 교향곡 2번 내림마장조 (1913)
  • 교향곡 3번 가장조 (1928)
  • 교향곡 4번 다장조 (1933)
  • 오페라 〈노트르담〉 (Notre Dame|노트르담fra, 1904-1906)
  • 오페라 〈프레디군디스〉 (Fredigundis|프레디군디스lat, 1916-1921)
  • 베토벤 주제에 의한 변주곡 (1923)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1899)
  • 헝가리 경기병 노래에 의한 변주곡 (1930)
  • 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 (왼손을 위한 작품, 1934)
  • 현악 사중주 2곡 (1925, 1929)
  • 피아노 오중주 (1926)
  • 클라리넷 오중주 2곡
  • 현악 삼중주 2곡
  • 왼손을 위한 피아노 사중주 (1932, 1938)
  • 오르간을 위한 전주곡푸가 마장조 (1924)
  •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 다장조 (1927)
  • 오라토리오일곱 봉인의 책》 (Das Buch mit sieben Siegeln|다스 부흐 미트 지벤 지겔른deu, 1935-1937) (요한묵시록 기반)

5. 1. 오페라

슈미트는 주로 교향곡과 같은 대규모 형식으로 작업했으며, 두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 '''노트르담''' (Notre Dame|fra): 1904년부터 1906년 사이에 작곡된 슈미트의 첫 오페라이다. 소프라노 그웬니스 존스와 테너 제임스 킹이 참여한 CD 음반이 발매되어 있다.
  • '''프레디군디스''' (Fredigundis|lat): 1916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작곡된 슈미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오페라이다. 제대로 된 녹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79년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 방송 녹음이 비공식적으로 발매된 적이 있다. 이 작품의 악보는 슈미트의 초기와 후기 양식 사이의 과도기적 스타일을 보여주며, 전통적인 조성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인 면모도 담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프레디군디스(프레데군드, 킬페리크 1세의 미망인)가 살인적이고 가학적인 인물로 묘사된 점과 대본의 구조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비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슈미트는 이후 이 작품에서 시도했던 실험적 요소와 초기 작품의 선율적 스타일을 통합하여 더욱 성숙하고 절제된 표현 방식으로 나아갔다.

5. 2. 교향곡

프란츠 슈미트는 주로 4개의 교향곡을 포함한 대규모 형식으로 작업했다. 그의 교향곡은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로부터 물려받은 빈 고전-낭만주의 전통을 계속 발전시킨 특징을 보인다. 형식면에서는 기념비적이며 언어면에서는 조성적이지만, 종종 혁신적인 디자인과 새로운 음악 어법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준다.

  • '''교향곡 1번 마장조''' (1899)

1896년 22세에 작곡되었다. 특히 스케르초 악장은 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성숙하게 흡수했음을 보여주며, 피날레에서는 슈미트 자신의 대위법적 기량을 잘 드러낸다.

  • '''교향곡 2번 내림마장조''' (1913)

1913년에 작곡되었으며, 슈트라우스막스 레거를 연상시키는 스타일과 브루크너의 웅장함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이 곡은 슈미트의 교향곡 중 가장 연주 시간이 길며, 거대한 규모의 오케스트라 편성을 사용한다.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 악장은 독창적인 변주곡 세트로,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의 특징을 암시하도록 짜여 있다. 복잡한 악기 편성은 대부분의 오케스트라에게 상당한 연주상의 어려움을 준다.

  • '''교향곡 3번 가장조''' (1928)

슈베르트의 맥락에서 밝고 선율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정성과 뛰어난 관현악법은 이 작품이 작곡가의 가장 화성적으로 진보된 작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1928년 국제 컬럼비아 그래모폰 콩쿠르의 오스트리아 부문에서 우승했으며(전체 우승자는 스웨덴 작곡가 쿠르트 아테르베르그의 교향곡 6번), 작곡 당시(1928년) 약간의 인기를 누렸다.

  • '''교향곡 4번 다장조''' (1933)

1933년에 작곡되었으며, 슈미트의 전체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작곡가 자신은 이 곡을 "내 딸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불렀다. 교향곡은 무반주 독주 트럼펫이 연주하는 23마디 길이의 긴 선율로 시작하며, 이 선율은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변형되어 다시 나타난다. 아다지오 악장은 거대한 ABA 세도막 형식이다. 첫 A 부분은 첼로 독주(슈미트 자신이 연주했던 악기)에 의한 광대한 비가로, 그 서정성은 슈트라우스의 ''변용''보다 10년 이상 앞선다(이 주제는 나중에 교향곡의 스케르초 악장을 형성하도록 변형된다). B 부분은 웅장한 장례 행진곡으로,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중 '장송 행진곡'을 분명히 참조하며, 오케스트라의 크레센도와 공 및 심벌즈의 타격으로 표시되는 극적인 클라이맥스(브루크너 후기 교향곡의 유사한 클라이맥스를 암시)를 거쳐 A 부분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5. 3. 오라토리오

슈미트의 성숙한 교향곡들과 더불어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오라토리오일곱 봉인의 책》(Das Buch mit sieben Siegeln|다스 부흐 미트 지벤 지겔른de)이다. 이 작품은 1935년부터 1937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요한묵시록의 구절을 가사로 사용했다. 슈미트 본인이 직접 오라토리오의 가사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도 했다.[11]

슈미트가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예언적인 측면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작품이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재앙을 강력한 어조로 예견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창의력은 절정에 달했으며, 단순한 찬미가 아닌 신비로운 묵상, 끔찍한 경고, 그리고 구원을 향한 기도를 담아냈다.

슈미트의 오라토리오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오스트리아-독일 오라토리오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요한묵시록을 주제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소수의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이전에 요한묵시록을 주제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인물로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심판의 날》), 슈나이더(《세계 심판》), 루이 슈포어(《최후의 것들》), 요아힘 라프(《세계의 종말》), 랄프 본 윌리엄스(《거룩한 도시》) 등이 있다.

《일곱 봉인의 책》의 초연은 1938년 6월 15일 에서 열렸다. 오스발트 카바스타가 지휘하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으며, 독창자로는 루돌프 게를라흐(요한 역), 에리카 로키타, 에니드 산토, 안톤 데르모타, 요제프 폰 마노와르다가 참여했고, 오르간은 프란츠 쉴츠가 연주했다.

5. 4. 피아노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 (1934)


'''음원 예시''' (마르쿠스 베커(피아노), 오오우에 에이지 지휘 하노버 북독일 방송 필하모니 관현악단 연주):

  • [https://www.youtube.com/watch?v=5BhPPCngnOY 1악장]
  • [https://www.youtube.com/watch?v=Ro-t795rbBo 2악장]
  • [https://www.youtube.com/watch?v=fpyfZALH-ZE 3악장]

5. 5. 기타 관현악곡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1899)
  • 베토벤의 주제에 의한 2개의 협주적 변주곡 (1923)
  • 헝가리 기병의 노래에 의한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1930)

5. 6. 실내악

슈미트는 실내악을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빌헬름 알트만과 같은 평론가들은 그가 쓴 작품이 중요하고 질이 높다고 평가했다.

  • 2개의 현악 사중주 (1925, 1929)
  • 피아노 오중주 (1926)
  • 2개의 클라리넷 오중주
  • 2개의 현악 삼중주
  • 왼손을 위한 피아노 사중주곡 (1932, 1938)

5. 7. 오르간 작품

프란츠 슈미트의 주요 오르간 작품은 다음과 같다.

슈미트의 오르간 작품은 길이, 복잡성, 연주 난이도 면에서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하지만 그가 지지했던 Orgelbewegung|오르겔베베궁deu(오르간 운동)의 영향 아래, 더 작고 명료한 음색을 가진 고전적 양식의 오르간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특징을 보인다.

참조

[1] 문서 Franz Schmidt (1874–1939) and Dohnányi Ernö (1877–1960): A study in Austro-Hungarian Alternativ.
[2] 문서 Franz Schmidt- Gesellschaft
[3] 웹사이트 Eine Franz Schmidt-Gedenktafel in Preßburg in: Österreichische Musikzeitschrift Volume 21 Issue 1 (1966) https://www.degruyte[...]
[4] 웹사이트 https://hungarytoday[...]
[5] 문서 Biographical note in insert to Amadeo recording AVRS 5004-5005.
[6] 문서 Carl Nemeth: Franz Schmidt. Wien 1957, p. 43. Cited in: Anton Bruckner Institut Linz – Anton Bruckner Chronologie Datenbank http://www.abil.at/D[...]
[7] 서적 The Strad: A Monthly Journal for Professionals and Amateurs of All Stringed Instruments Played with the Bow https://books.google[...] Lavendar Publications 1989
[8] 문서 This paragraph taken from German Wikipedia.
[9] 문서 This paragraph re-worked from German Wikipedia.
[10] 문서 This paragraph from German Wikipedia.
[11] 문서 F. Schmidt, Einige Bemerkungen zum Text des Oratoriums (Written for the original production). Reproduced in insert booklet to recording, Amadeo LP set AVRS 5004/5005 St, cond. [[Anton Lippe]], [[Munich Philharmonic]], [[Graz|Grazer]] Domchor, [[Franz Illenberger]] (organ), with [[Julius Patzak]] (Evangelist), [[Otto Wiener (baritone)|Otto Wiener]] (Voice of God), [[Hanny Steffek]], [[Hertha Töpper]], [[Erich Majkut]], [[Frederick Guthrie (bass)|Frederick Guthrie]]. Recorded Stephaniesaal, Graz, January 1962.
[12] 간행물 The Future of the Orchestra 1996
[13] 문서 シュトラッサー (1977)、174頁。
[14] 문서 シュトラッサー (1977)、175頁。
[15] 문서 여기서 4인방에 속한 작곡가들은 [[한스 피츠너]],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프란츠 슈미트, [[프란츠 슈레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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